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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실력으로 환경을 이기다

조선 시대에 종삼품(從三品)이라 하면 과연 얼마나 높은 위치일까. 조선 당시 품계(品階)는 총 18품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종3품은 제6등급에 해당한다. 21세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현행 9급으로 나뉘어진 공무원 체계를 생각해본다면 3급에 해당하는 고위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노비의 신분으로 이런 종삼품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었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으로 말이다. 


장영실은 천출로서 관노비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년도가 밝혀지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아산장씨 성을 가진  장성휘(裝成暉)라는 인물이다. 그 집안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송나라에서 망명한 장서(裝壻)라는 귀화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장영실은 이러한 장서의 9세손이고 아산장씨 성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친이 관기(官妓)였던 탓에 관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나게 된다. 조선시대 신분제도에 의하여 천인이었던 모친의 신분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장영실은 관노였지만, 일직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장영실이라 하면 세종대왕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사실 그는 태종으로부터 이미 발탁을 받아 궁 안에서 기술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후에 세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종으로부터 더없는 신뢰와 촉망을 받게 되었고, 각종 발명품을 기반으로 세종의 통치를 뒷받침하게 된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장영실을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여실히 드러나있다. 


영실의 사람됨이 솜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도 뛰어나서, 매일 강무를 할 때에는 내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게 하기도 한다. 


장영실의 업적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 유명한 자동 물시계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를 비롯하여 간의대,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갑인자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세종은 백성들로 하여금 과학적인 농사를 짓게 하였고, 세종이 꿈꾸었던 이상국가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하늘(天)과 사람(人)과 땅(地)이 하나로 연결되는 천지인의 왕도정치에 굳건한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장영실에 대한 세종의 찬사를 하나 더 확인해보자. 


장영실이 비록 지위는 낮으나, 그 재주가 민첩한 것은 조선 땅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이토록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탓이었을까. 노비 출신에서 종삼품에까지 올랐지만, 어느날 갑작스런 의문의 사건 이후 그의 행적은 일체 알려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한 발명품들을 수도 없이 만들었던 장영실이었지만, 세종의 가마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여 임금의 가마가 부서져 버리는 사건이 생기고 만다. 이 일을 계기로 장영실은 불경죄로 몰려 관직을 빼앗기게 되고, 그 이후로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도의 기술로 물시계도 만들었던 장영실이 어찌하여 임금이 탈 가마를 그리 허약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런 석연치 않은 사건 이후에 완전히 종적을 감추게 된 것은 왜일까. 


이것은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사실 장영실의 생몰연대가 미상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장영실은 당시 신분제도 하에서 그 누구도 꿈꿀 수 없었던 신분상승을 이루었고, 그 배경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실력이었다. 그리고 단지 신분상승만을 이룬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바탕으로 백성들이 절기에 맞는 과학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를 얽매는 환경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집중하여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고, 그로인해 얻은 관직으로 세상을 이롭게 할 발명품을 만드는 데에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던 장영실. 그가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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