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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

다산 정약용의 애민정신과 실학사상

사람이 책을 한 권 쓰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아마 평생동안 책 한 권 쓰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많은 저서를 남긴 위인들이 있다. 노벨문학상(Nobel Prize in Literature)을 받았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경우에는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소설 부문에서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받았고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펄벅(Pearl Sydenstricker Buck)은 대지(The Good Earth)와 같이 주옥같은 작품을 비롯한 8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영국의 정치가였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단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정치인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문학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무려 90여 권이라는 엄청난 저서를 남겼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엄청난 양의 책을 남긴 대학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 이다. 다산은 위에서 언급한 위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무려 500여 권의 저서 속에 그의 따뜻한 애민정신과 실용적인 실학사상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저술하였는데도 분야별로 그 깊이 역시 대단했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때는 정조 13년 이었다. 그 후 정조 23년에는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조선시대 6조 체계에서 형조(刑曺)는 법률과 소송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이러한 형조에서 판서(判書)와 참판(參判) 다음으로 높은 참의(參議)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정삼품에 해당하는 벼슬인데, 지금으로 치면 정계를 통하제 않고 일반인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공직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어 18년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1800년 정조의 죽음과 함께 이루어진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의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형이었던 정약종은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은 간신히 참수는 면하였지만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정약용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부조리에 대한 항거를 붓으로 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기게 된다. 그는 책 속에 사람을 향한 사랑을 품은 애민정신으로 가득한 실학사상을 담아내었고, 단지 사상을 펼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실질적인 실현 방법까지 제시를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주옥같은 저서를 통하여 조선의 실학사상을 꽃피웠다. 단지 이론에 머물러 있는 쓸모없는 학문을 지양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그는 나라의 발전 즉, 부국강병을 위하여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평생동안 고민하였고 그것을 책으로 풀어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정약용의 저서와 활동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 등, 시험문제를 위한 지식에 그치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실 더욱 필요한 것은 '실용'이라는 껍질 속에 숨어 있는 다산 정약용의 애민정신 이다. 


1910년 경술국치를 죽음으로 항거했던 매천 황현(黃玹)은 정약용의 저술을 접한 후, 그가 남긴 학문적 깊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다산의 사상 속에는 사람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애민정신은 그의 저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노인이나 어린 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중요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역할을 국가가 담당해야 함을 피력하고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기저에 있는 따뜻한 애민정신을 기억하고 사람을 위하고, 사람을 살리며,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을 향한 열정을 품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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