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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역사

퇴계 이황 79번의 물러남

세남매집 2018. 7. 19. 21:16



퇴계 이황

79번의 물러남

괴산에는 유명한 계곡이 참 많다. 그 중에서도 쌍구구곡은 멋들어진 기암절벽(奇巖絶壁)과 울창한 숲 속에 꺾어진 노송(老松)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쌍구구곡은 퇴계 이황 선생이 그토록 아낀 절경을 가진 곳으로, 살아 생전에 여러번 찾아 소요(逍遙)했다고 한다. 퇴계는 또한 소백산을 그리 사랑했다고 전해지는데, 1549년 봄에 소백산을 유람한 후 소백산 철쭉을 비단 장막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퇴계 이황이라 하면 천원권 지폐에 그려진 초상이나, 학창시절 시험을 위해 외웠던 그의 저서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퇴계와 관련된 '79'라는 숫자를 전하고 싶다. 




이황(李滉)은 33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34세부터 벼슬길에 오른다. 그 후 49세가 되던 때에는 사직을 하고 20여년 동안 학문과 저술활동에 매진을 하게 된다. 자녀들과 후학들에게는 과거 응시를 종용하였던 그가 왜 돌연 관직에서 물러났던 것일까. 그는 관직은 등졌지만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다. 이황의 50세 이후의 삶이 더욱 빛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진짜 선비의 모습을 감출 것들에서 멀어진 후, 세상 누구보 부인하지 못할 참된 선비의 모습을 살아간 것이다. 


선비가 한 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골이 되는 것이다. 한 번 공명의 굴레 속으로 얽혀 들어가면 다시는 물러날 기회가 없으니 한탄스럽도다.


당시 조선에는 오늘날의 정년에 해당하는 치사(致仕)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 나이는 70세였지만 이황은 49세의 나이에 벼슬을 그만 두게 된다. 벼슬에서 물러나는 과정도 참 드라마틱하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약 90여 번의 관직에 임명을 받게 된다. 그 중 이황은 79차례나 관직을 고사하게 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49번은 조정에서 반 강제로 그를 불러들이게 된다. 그 마흔아홉 번의 소환에서도 몇 차례의 퇴귀가 또 있었다. 46세가 되던 해에는 아예 호를 퇴계(退溪)로 바꾸어버리는데, 명종은 그를 그리워하여 이황이 있던 계상서당을 그림으로 담아오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 그는 대체 왜 이렇게 관직을 마다했던 것일까. 


퇴계는 과거 조광조 등의 사림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통하여 끔찍한 방법으로 제거를 당했던 이유가, 물러날 수 없는 조선의 정치구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물러나야 함에도 물러날 줄 모르는 욕심에 대해서도 경계한 바가 있다. 그가 인용했던 주역(周易) 건괘(乾掛)의 구절을 살펴보자.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며, 있는 줄만 알고 없는 줄을 모르고, 얻는 줄만 알고 잃을 줄을 모르면 어찌 성인이라 하겠는가


퇴계 이황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골치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화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물러섬의 미학을 실천하고 퇴(退)로를 선택하여 진정한 성리학적 가치관을 몸소 실천하는 선비의 모습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20여년 동안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부패와 비리 그리고 다툼으로 물들어 있던 당시의 조선 사회를 살아가는 선비들에게, 말로써가 아닌 실천을 통하여 도덕성의 회복을 촉구했던 것이다. 


퇴계 이후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정치판 돌아가는 꼴은 매한가지 이다. 아직도 젊은 소장파 의원들은 의지를 가지고 정계에 진출하여 진흙밭에 구르다가, 재충전이나 자아성찰의 기회라고는 조금도 가지지 못한 채로 어느새 물러날 줄 모르는 그물 속 물고기의 모습을 보인다. 또한 존경 받던 정치인이 은퇴를 몇 번 씩이나 번복하여 결국은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젊을 적 60대 정치인들을 보고 60대에는 뇌가 썩는다며 퇴진을 요구했던 정치인 출신의 한 작가는, 이제 60에 접어들면서는 본인의 지성을 그 어느 때 보다도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겸손을 모르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홀로 활동을 하며 저술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다. 후학 양성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비집고 올라올새라 짖누르기 일쑤이다. 젊은이들은 아무리 준비를 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다. 기업에는 물러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후배를 키우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후배들이 설 자리 자체가 없는 세상이다. 


퇴계를 떠올리며 이제는 지폐의 1,000이라는 숫자가 아닌, 79라는 숫자가 기억되기를 원한다.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하였다.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경건히 하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깨우친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 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퇴계의 79라는 숫자를 통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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