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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따스함이 깃든 혁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사법시험(司法試驗)이라 하면 어떤 사람들이 합격한다고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사법시험이라 하면, 굉장히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어릴적부터 전교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런 사법시험에 아홉 번이나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에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율곡 이이 선생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의 한 사람인 율곡은 어릴 때부터 신동의 소리를 들어가며 자랐고, 불과 13세의 나이에 진사(進士試)에 합격할 정도로 천재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사상적 깊이와 뛰어난 지성은 퇴계 이황 역시도 인정했다. 


율곡은 퇴계 이황보다 35년이나 어린 후배 학자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석학인 퇴계 선생과 대등하게 성리학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퇴계 이황은 그 후에 율곡을 두고 후생가외(後生可畏, 두려워할 만한 후배 학자)라면서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퇴계는 율곡을, 자신이 세워둔 성리학적 기초 위에 실천적인 개혁안을 덧입혀, 조선 전기를 장악했던 훈구 세력의 부조리를 극복할 새로운 인물로 보았던 것이다. 


중종대의 사화로 인하여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던 사림 세력들은, 선조의 즉위와 함께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이미 명종대에 청요직(淸要職)을 거치며 경력을 쌓아가던 율곡은 선조의 사림 등용 정책에 맞추어 대대적인 개혁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그는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왕도정치를 강조하고 당대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꼬집어내었다. 그는 언제나 개혁을 주장했는데, 경장(更張) 즉, 조선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와 군사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개혁과 조율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동호문답 이외에도 그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 당시 조선 사회의 상황에 일맥상통하는 제도와 법제가 필요함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백성들의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또한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통하여 조광조 시대의 이상정치를 다시 재현하고자 했고, 격몽요결(擊夢要訣)을 저술하여 성리학적 가치관을 조선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48세가 되던 해인 1583년에는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다. 조선의 군사 체계가 무너져 있으니 지금부터 미리 10만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라의 형세가 떨치지 못함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대로라면 10년이 채 못가서 조선에는 흙이 무너지는듯하는 재앙이 있을 것이다.


율곡은 시무육계조를 통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그 이듬해인 158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천재적인 성리학자가 불과 49세의 나이로 아깝게 조선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불과 8년 뒤인 1592년에, 조선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왜란의 결과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왜란 당시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었던 서애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율곡이 계획한 정책들을 혹자들은 비난하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꼭 들어맞으니 그의 선견지명을 참으로 따라갈 수가 없다.


율곡 이이는 당시 조선 사회의 여러가지 병리적 현상들을 정확하고 냉철하게 꼬집어내었고, 그로 인해 앞으로 조선이 봉착하게 될 문제점들까지도 정확하게 예견하였다. 더 나아가 그 문제점들을 해결할 정책과 대비책 까지도 내놓았던, 말 그대로 현실정치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였던 해결책들은 모두 일부를 위한 개혁이 아닌, 온 백성을 위한 따스함이 깃든 혁신이었다. 


율곡이 그렸던 이상적인 조선은 서로가 다투는 것이 아닌 백성 모두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대동사회(大同社會)였던것이다. 그에 따라 힘에 의한 패도정치를 지양하고, 지도자가 먼저 모범을 보일 때에, 백성들은 강제력에 의해 마지못해 따라오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군주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 중심의 토지제도를 시행할 것을 주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가 공존하는 유교적인 이상향을 추구했던 것이다. 


21세기형 통제새로운 유형의 귀족들이 교묘하게 국민들을 조종하고 억압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율곡 이이가 원했던 따스함이 깃든 혁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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